노혜경 칼럼




새로운 사태, 52시간

노동을 통해서든 자본을 통해서든, 일하는 바로 그 사람, 노동하는 인간의 목적은 똑같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구호인 사람 사는 세상. 숫자로 건조하게 표현되지만, 주 52시간 일해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을 향한 출발을 “새로운 사태”라 불러보고 싶다.

교황 레오 13세가 ‘노동헌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새로운 사태’를 반포한 것은 1891년이다. 자본의 노동착취가 극에 달해 노동자들의 처지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시절, 레오 13세 교황은 이를 “새로운 사태”라 부르며,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노동자 문제에 개입해야만 한다고 설파하였다.

‘노동헌장’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노동은 인간 존엄성의 본질적 측면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간 노동의 산물인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 또 하나는 노동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하고 교회와 정부는 이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하여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기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개인을 자본증식의 수단으로 삼아 착취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는 한편,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경시하는 사회주의적 해결 방법에도 반대했다.

반포된 지 120년을 훌쩍 넘긴 이 ‘노동헌장’은 ‘사십주년’, ‘노동하는 인간’ 등의 회칙으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노동이 모든 사회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인간은 노동을 하여 먹고살고, 노동을 통해 자기 존엄성을 확보한다. 노동이 자연을 변화시켜 자본을 낳고, 노동이 몸과 영혼을 연결시킨다. 노동은 단순히 상품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작업이다.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은 노동이 생계를 위한 도구가 아닌, 인간 존엄성을 확보해나가는 본질적 특성이라는 뜻을 드러낸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드디어 시행되었다. 사람은 하루에 4시간 정도만 노동해야 한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주장(<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이르기엔 매우 넘치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론상 하루 8시간에서 12시간의 노동을 주 5일 정도 하게 되는 셈이다. 임금이 줄어든다는 노동자의 염려와 고용이 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부의 염려와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사용자의 염려를 해소하지 못한 채로 일단 시작된 이 새로운 제도를 나는 “새로운 작은 사태”라고 불러보고 싶다.

다양한 염려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제도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나친 노동에 시달리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고, 일과 여가의 균형을 맞춰 심신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종교적이거나 몽상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주 52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의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는 기업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왜 갈등과 대립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할까. 아니 돈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할까. 일하는 바로 그 사람, 돈을 벌고 쓰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안 한다. 주 52시간을 노동한다 해도,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그 사람은 일터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이동하고 다시 집으로 복귀하기까지 최소한 하루 두 시간 이상을 일하는 데 더 바친다. 여전히 길다.

노동이 자아실현을 위해 중요하다고 교황은 말하지만, 실제 현실은 개인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노동보다는 도구화되고 명령에 따르고 주어진 과업을 기계적으로 수행하게 되기 일쑤다. 노동을 해서 먹고산다는 것을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길 만한 심리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 하다못해 1원 1표가 아니라 1인 1표가 민주주의라는 생각을 정치인, 언론인들이 뼛속 깊이 좀 새기면 좋겠다. 모든 공적 담론은 인간을 위해 있지 돈을 위해 있지 않다는 기본이 지켜지면 좋겠다. 그래야 노동자 행복한 꼴을 못 보는 한 국적기 회사 경영인 가족 같은 사람이 줄어든다. 노동을 통해서든 자본을 통해서든, 일하는 바로 그 사람, 노동하는 인간의 목적은 똑같다. 바로 문재인 정부의 구호인 사람 사는 세상. 숫자로 건조하게 표현되지만, 주 52시간 일해도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을 향한 출발을 “새로운 사태”라 불러보고 싶다.

폴 크루그먼이 전경련에서 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들렸나 보다. 크루그먼은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한 질문에 ‘그렇게나 많이 일합니까’라고 반문하고, 노조가 생산력을 저하시키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조 가입률은 더, 심지어 70% 이상이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요지로 답하여 전경련을 당황시켰다. 그러나 크루그먼의 사상은, 이미 100년도 더 된 옛날부터 들려온 아주 오래된 새로운 사태다. 노동이든 자본이든, 그 한복판에 인간 존엄이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