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갈등 처리하기

불과 며칠 전인 9월 17일에 바로 우리 이웃 동네인 메릴랜드에서 57세 한인가장이 아내와 삼남매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부부와 10살, 11살 두 남매가 숨지고 22세의 의붓딸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부부의 심한 갈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대 초반에 미국에 와서 자동차 바디 정비사로 일하면서 초혼과 재혼에 실패를 하고 12년 전에 결혼한 세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남매를 낳으며 행복하게 사는 듯했으나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부부 간에 불화가 깊어졌고, 급기야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미국 한인사회에서 이런 충격적인 사건의 강도와 빈도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아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의 대부분의 원인은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가 합해진 말입니다. 칡은 나무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면서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데서 온 말입니다. 갈등은 영어로 conflict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conflictus에서 왔는데, 함께(together)를 의미하는 con이라는 말과 부딪힌다(strike)는 의미를 지닌 fligere라는 말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즉 갈등은 strike together(서로 치고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의 색깔과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갈등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갈등은 자기 자신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외적인 갈등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는 무관한 갈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도 매우 다양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갈등의 소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격상의 차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생기는 갈등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명분이나 의견에 차이가 있어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자녀교육을 놓고 부부간에 일어나는 갈등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갈등에 속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생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different)과 틀린 것(wrong)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뿐이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틀린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로 다투는 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갈등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중요한 과제는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는 스트레스도 적절하게만 활용하면 삶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듯이, 갈등도 지혜롭게만 대처한다면 독이 아니라 되레 약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서로 배배 꼬여있는 칡과 등나무 줄기, 서로 뒤엉켜 있는 실타래의 실오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매듭을 풀어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힘이 들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진정 행복해지려면 어떻게든 이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노력을 해도 갈등의 매듭이 풀려지지 않고 줄곧 평행선으로 달릴 때는 타협이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국에 이르게 되어 피차 피해를 입게 됩니다. 영어 표현으로 ‘meet halfway’ 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에서 만나다’ 즉 타협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인들은 흑백논리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회색이라는 것을 체질상 싫어합니다. 그래서 ‘회색분자’라는 말은 매우 모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회주의자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은 흑과 백보다는 매우 다양한 회색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색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뉴앙스를 풍기긴 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회색분자가 지혜로운 자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기의 고집을 꺾고 적절한 선에서 양보하면서 좋은 의미의 타협을 할 줄 아는 자가 진정 지혜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노력해도 끝내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미국 사람들은 “We agree not to agree.“(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했습니다)라는 식으로 갈등을 재치있게 봉합하기도 합니다. 동양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이 같아서는 아니다“ 즉 ”비록 생각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갈등을 처리하는 데에는 타협 즉 우회하는 방법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면으로 갈등에 대면(confrontation)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곡직(是非曲直) 간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많은 위험(risk)이 따르지만 잘만 된다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그 갈등을 회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명히 갈등의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갈등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유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정면으로 대면하는 방법 못지않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갈등을 줄이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이 자주 언급됩니다. 부부 클리닉의 상담전문가들에 의하면, 대화의 기술 부족이 부부 갈등의 가장 큰 요인입니다. 무의식중에 내뱉는 말 한 마디가 대화의 걸림돌이 되어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일로 인해 심각한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부부의 경우, “음식 좀 제대로 해 봐”라는 식의 명령형, “어머니에게 잘 못했다간 국물도 없어”라는 식의 경고형, “현모양처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냐”하는 식의 설교형, “이미 학문적으로 다 증명된 것인데 당신은 그런 것도 몰라”라는 식의 논리적 논쟁형, “당신은 열등감이 많아 처갓집 이야기만 나오면 펄펄 튀는 것 같아, 그렇지?‘라는 식의 해석형, ”당신이 돈 많이 못 벌어 주눅들어 있는 것 다 알아“식의 동정형,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야. 간단히 결론만 말해봐“라는 식의 제촉형 등등 잘못된 대화법이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상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사소통기술(communication skill)을 터득할 필요가 있는데,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Communication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개와 고양이의 의사 전달법입니다. 개는 반갑다는 표시로 꼬리를 치켜들고 좌우로 살랑살랑 흔듭니다. 그러나 위협을 느끼거나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싶을 때는 꼬리를 내립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개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와 고양이는 사귀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숙어인지는 모르지만, 영어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It‘s raining cats and dogs.”라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여러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서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난장판을 만드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만들어낸 숙어가 아닐까 혼자서 추측해보았습니다. 동양에서는 개와 원숭이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서로 앙숙관계인 경우에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양식으로 말하면 견묘지간(犬猫之間)으로 표현해야 맞을 것 같네요. 어쨌든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문화의 차이로 인해 갈등을 낳을 수 있는 소지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이리 와” 할 때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손 제스처가 정반대잖아요? 우리는 자칫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즉 말과 실제가 다른 모순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의사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매순간 절감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과 같이 훌륭한 분도 의견 차이로 인해 평소 남달리 절친으로 지내던 바나나와 다툰 후에 갈라선 적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 할 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서로 의견이 갈리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로서 1차 선교여행 때 함께 동행했으나 너무 힘이 들어 그만 중도하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를 이번에도 다시 대동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견이 생겨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서로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팽팽하게 대립하게 되자 결국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선교팀을 꾸려 따로 선교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들의 다툼은 교리 때문이 아니라 서로 생각과 견해가 달라서 일어난 다툼입니다. 바울은 완벽주의자라고 할 만큼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대충대충, 얼렁뚱땅, 설렁설렁과 같은 말은 그의 사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는 기질상으로 담즙질에 해당하는 자로서 대체적으로 사람보다는 일을 중시하는 타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일이 좀 덜 되더라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 요즘으로 말하자면 훈남 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나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의 중앙무대에 진출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며, 항상 2인자로서 그리고 조역으로서 만족하는 도량이 넓은 자였습니다. 이러한 성격 차이로 갈등이 빚어졌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한순간 감정싸움을 하며 ‘심하게’ 다투었지만 그 감정의 앙금을 키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전파라는 중차대한 명분을 내세워 다시 선교의 동역자로 협력하는 매우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한 때 못마땅하게 여겼던 마가 요한도 다시 용납하여 선교의 조력자로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다툴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투기 전이든 다툰 후든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다스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갈등 해소의 관건입니다.
잠언 17:14은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갈등을 서둘러 무마하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가 빚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곪기 전에 속히 약을 써야 합니다.

갈등이 생기면 가뜩이나 힘든 삶이 더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소중한 삶의 에너지가 쓸데없이 낭비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갈등을 줄이고 해소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살맛이 날뿐 아니라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잠언에는 갈등과 관련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잠언 25:24)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膳)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따라 갈등을 줄이고 잘 해소함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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