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인생 수리(修理)

언젠가 Washington Post에서 아주 흥미로운 식탁 사진 하나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테이블은 다리 네 개 중에 하나는 목발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가구를 만든 분은 일부러 이런 가구들을 만들어 자기 나름대로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가구들을 가리켜 ‘컨셉가구’(concept furniture)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의미가 담겨있는 가구라는 뜻이겠죠. 목발 하나를 끼워 넣은 이 테이블을 통해 이 분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식탁에 다리 하나가 망가졌다고 해서 아주 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다리를 다치면 목발을 짚고 다니듯이 이 가구도 목발 하나만 받쳐주면 멀쩡한 테이블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 인생에도 꼭 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한 부분이 망가졌다고 아예 쓸모없는 인생으로 폐기처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고장난 인생을 잘만 수리하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성경을 보면 고장난 인생이 고침받고 유용하게 쓰임받은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인생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유다 땅에 큰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나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가장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민생활이 한 10년쯤 되었을 때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마저 죽고맙니다. 이제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이렇게 과부 세 사람만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모압으로 가족이민을 갔는데 잘 살기는커녕 오히려 가정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고향땅 예루살렘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셔서 농사가 잘돼 형편이 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부를 떼어놓고 혼자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작은 며느리가 기어코 따라가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 금의환향은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정든 땅으로 돌아오자 동네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들어 “아니, 나오미 아니야!” 하면서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조금도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이요,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나오미의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이 망가지고 인생의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라의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냥 신세타령만 하고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 얄궂은 신세만 한탄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어야 할까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장난 인생을 고쳐주시는 치유의 하나님, ‘여호와 라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하나요? 정비소에 가서 고쳐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고장이 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하게 고장이 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가볍게 고장이 나기도 합니다. 고장이 났다고 무조건 정크야드에 갖다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금만 손을 보면 다시 쓸 수 있으니까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장이 났다고 무조건 용도폐기해서는 안 됩니다. 잘만 고치면 얼마든지 유용하게 쓸 만한 인생인데 너무나도 쉽게 정크 처리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나오미의 인생뿐만 아니라 청상과부가 된 룻의 인생도 고장난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인생 반전(反轉)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구석을 보아도 소망스러운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던 그들에게 소망의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보아스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셨고, 마침내 보아스와 룻 부부를 통해 다윗과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지게 되는 감동적인 인생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자칫 대가 끊어질 위기에서 나오미는 늘그막에 ‘생명의 회복자요 노년의 봉양자’인 손자를 보면서 ‘마라’에서 ‘나오미’로 회복되었습니다. 한편 청상과부 룻은 메시야의 계보를 이을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룻기는 흔히 효도를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지만, 사실 룻기가 정경 66권 중에 포함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제 곧 전개될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 왕의 계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의 계보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룻기 4:21-22)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자칫 망가진 채로 존재도 없이 끝나고 말았을 두 여인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토록 존귀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장난 인생이라고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고장이 나게 마련입니다. 어떤 고장이 나느냐, 얼마나 심각한 고장이 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전혀 고장이 나지 않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혼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나는 사별의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은 이제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라고 푸념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마라의 인생을 나오미의 인생으로 역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고난은 하나의 쉼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빚어가시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스스로 덜렁 마침표를 찍는 어리석음을 범하곤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8장에서 광야 40년을 회고하는 가운데 그 모든 과정이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마침내’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삶이 ‘마침내’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나오미와 룻의 드라마틱한 인생반전 외에도 성경에는 탁월한 연급술사이신 하나님의 기막힌 솜씨로 고장난 인생을 깔끔하게 수리받은 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셉의 인생은 만신창이가 되다시피 망가졌지만 어떻게 그러한 인생반전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극적인 결말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쉼표를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여 일찌감치 삶을 포기했더라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영광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그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자입니다. 애굽의 왕자로서 온갖 영화를 누렸던 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목동의 신세로 전락했을 때 그의 인생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망가진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망가진 인생을 다시 고쳐주셔서 애굽 왕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출애굽의 영도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욥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열 자녀를 일순간 잃어버리고 그 많던 재산과 종들도 일순간 다 잃어버리고 몸은 온통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보다 더 망가지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히 메가톤급의 고장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폐차 수준입니다. 그래서 그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한 순간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용케도 믿음을 잘 지켜나감으로써 마침내 정금 같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이 고장나면 고장난 것만 생각하지 수리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의 문제에만 골똘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인생 수리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삼중 장애를 딛고 위대한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는 “닫힌 문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등 뒤에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설리반은 헬렌 켈러에게 등 뒤의 열린 문을 보게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귀가 막히고 눈이 막히고 입이 막혀 있었지만, 닫혀진 문을 보지 않고 열려진 문을 볼 수 있었기에 놀라운 업적을 일궈낸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카드 중에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When one door shuts, another opens.)는 글귀가 인쇄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일어날 때 그 문제에만 함몰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동서남북 네 방향이 막혀있을 때 제5 방향인 위를 쳐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너무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안달복달하며 조급해하지 말고 좀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한때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기다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True love waits.)“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널리 유행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을 패러디해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True faith waits).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준 반면교사의 교훈은 조급함이 가져오는 화(禍)와 기다림이 가져다주는 복(福)입니다. 조급함으로 ‘이스마엘’을 낳았고 기다림으로 ‘이삭’을 얻었음을 우리 모두 마음 속 깊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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