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절망하지 맙시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절망(絶望)은 글자 그대로 희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죽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 쥐로 실험을 했는데, 한 마리는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상자에 가두고, 다른 한 마리는 아주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상자에 가두었는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상자에 가둔 쥐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지만 소량의 빛이라도 빛이 들어오는 상자에 가둔 쥐는 훨씬 오랫동안 버티었다는 것입니다. 깊은 갱도에 갇힌 광부들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되곤 합니다. 바깥과 교신이 되는 상황과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각각 버티는 힘은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가질 때 생존율은 훨씬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에게 여자를 만들라고 명령했고, 그 여자의 이름을 판도라라고 불렀습니다. 판도라(pandora)는 그리스말로 ‘모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pan(모든)과 dora(선물)의 합성어입니다. 제우스는 판도라의 탄생을 축하하며 모든 선물이 들어있는 상자 하나를 주면서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판도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어느 날 그 상자를 열고 맙니다. 그러자 그 상자 안에서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화들짝 놀란 판도라는 급히 상자를 닫았으나 상자 안의 나쁜 것들은 이미 전부 빠져나온 뒤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희망만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그 상자 안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 신화가 의미하는 바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악들이 횡행하며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남아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희망을 잃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희망을 일깨워 주는 잡지로 잘 알려진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가 20세기의 가장 우수한 수필로 꼽았던 수필이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었습니다. 삼중고(三重苦)의 헬렌 켈러 여사는 가히 희망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 황제는 죽을 때 “내 생애에 행복한 날은 단 6일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는데, 헬렌 켈러는 “내 생애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했다니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태양을 바라보고 서면 자기 그림자를 보지 않게 되지만, 태양을 등지고 서면 자기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태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을 등지면 희망이 사라집니다. 시편 기자는 낙망하여 불안해하는 자신을 향해 하나님을 바랄 것을 촉구합니다.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hope in God)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둘 때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연인을 대상으로 한 노래이지만, 후렴 부분만 보면 대상(you)을 하나님으로 대입해도 괜찮을 것 같은 노래가 있죠? ‘You are my sunshine’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루지애나주 출신의 Jimmie Davis라는 컨트리 뮤직 가수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루지애나 주지사를 두 번이나 역임한 일도 있어서 이 주의 공식 노래 둘 중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제법 긴 노래지만, 후렴 부분이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일전에 저희 부부는 손녀를 데리고 스카이라인 단풍구경을 다녀왔는데, 차 안에서 어린 손녀와 함께 이 노래를 여러 차례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You Are My Sunshine / My only sunshine. / You make me happy / When skies are grey. / You'll never know, dear, / How much I love you. /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way.
이 노랫말 중 특히 “하늘이 잿빛이어도 그대는 나를 행복하게 하네”라는 가사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우리의 삶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도 하나님만 생각하면 행복한 마음이 든다면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게 맥없이 돌아가시자 의기소침해지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댔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삶에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는 동료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나섰고, 같이 있던 다른 제자들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밤새껏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새벽이 부옇게 밝아올 무렵, 예수님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고기잡는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인 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너희들에게 고기 잡은 것이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져라. 그리하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낯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데자뷰의 상황이었습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했더니 정말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겨우 그물을 끌고 나와 잡힌 고기를 세어보니 모두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경험이었으면 고기 마리 수를 나중까지 기억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이 성경 본문을 대할 때마다 늘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여 잔뜩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날 공부하는 내용이 바로 이 대목이었습니다. 마치 자기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맞춤형 성경공부로 여겨질 만큼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실의에 빠졌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새로운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죽음을 극복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가슴에 밀물처럼 강하게 부딪혀 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되지. 주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새로운 힘과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중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볼펜을 만드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는 볼펜에다가 자기에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요한복음 21:11의 153이라는 숫자를 심볼로 새겨 넣기로 했습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싸인펜을 만드는 비즈니스를 더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싸인펜에는 볼펜의 심볼과 구별하기 위해 153을 거꾸로 뒤집은 351이라는 숫자를 심볼 넘버로 새겨 넣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만, 모나미 볼펜, 모나미 싸인펜이 얼마나 유명합니까. 잉크가 균일하게 잘 나올 뿐만 아니라 한참 동안 쓰지 않다가 써도 잉크 찌꺼기가 나오지 않는 우수제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마니, 모라니 등등 비슷한 이름의 유사품들이 우후죽순처럼 나돌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명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칠전팔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칠전팔기의 신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우리는 이러한 오뚝이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이 항상 탄탄대로일 수만은 없습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웅덩이도 있고 장애물도 있습니다. 넘어야 할 산도 있고 건너야할 강도 있습니다. 때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벼랑에서 위기감을 느낄 때도 있으며, 때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좌절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넘사벽’(넘어설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장이구나’ 싶은 한계상황에 맞닥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끝인 것 같아 보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쉼표에 불과했습니다. 김소엽이라는 여류시인이 남편을 먼저 하나님 나라로 보낸 후 기도하며 쓴 시 가운데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쉼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육신의 죽음조차도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쉼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을 버리는 것이 절망이요, 절망이 곧 죽음입니다.


금세기의 뛰어난 정신과의사이며 심리학자였던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어둡고 캄캄한 현실 가운데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감옥에서 동료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는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밤이면 저 창문 너머로 영롱한 별이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동료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심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어느 날 노동시간에 흙 속에 파묻힌 유리 조각을 몰래 바지주머니에 숨겨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언제 개스실로 불려가 처형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 유리조각으로 매일 아침 저녁 하루에 두 번씩 면도를 했습니다. 그 때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독백을 하곤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아침이 되면 독일 나치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유태인들을 일렬로 세우고 그 날 처형할 사람들을 골라 개스실로 끌고 가는데, 생생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쓸모가 있다고 해서 뒤로 미루고 비실비실 삶의 의욕을 잃고 있는 자들을 먼저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은 언제나 깔끔하게 면도하여 삶의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항상 처형 순번이 뒤로 밀려났습니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6개월이 채 안됐지만 프랭클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하루 평균 30명씩 병사자가 발생했는데 독일군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루 평균 5명 안팎으로 병사자가 줄어들더니, 그 해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전쟁이 끝나지 않자 갑자기 하루 평균 80명 이상이 죽어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훗날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되었으며, 소위 ‘의미요법’(logotherapy)이라는 정신치료법을 창안해내기도 했습니다. 의미요법은 우리 인간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만 하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상담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상담이론입니다.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절망을 딛고 부활 승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를 마련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사전에 ‘절망’이라는 단어가 자리할 틈새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든 지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희망을 가집시다. 인생은 수많은 쉼표와 하나의 마침표로 이루어집니다. 그 마침표마저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찍으실 겁니다. 쉼표를 마침표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그 쉼표들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볼 수 있도록 신앙적인 안목을 키워나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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