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염려하지 맙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달달 외웠던 영어 문장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As rust eats iron, so anxiety eats heart(녹이 철을 좀먹듯이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좀먹는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상기시켜주는 서양 속담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좀먹고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요즘 서양의학에서는 병이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점차 더 인정하게 되었고, 그러한 경향을 전문술어로 ‘Somatization’이라고 합니다. ‘정신적, 감정적 문제의 신체화(身體化)’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허균은 동의보감에서 심자일신지주(心者一身之主), 즉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건강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에서는 그러한 ‘건강염려증’을 일컫는 의학용어를 만들어 냈는데, Hypochondriasis(하이퍼콘드리아시스)라는 용어입니다. 기침 한번만 해도 폐결핵이나 폐암이 걸린 것이 아닐까 염려하고, 경미한 두통 증세에도 뇌암이 아닐까 걱정하고, 배가 아프면 위암이 아닐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다 건강염려증세입니다.

한 평생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책을 저술하고 강연을 한 죤 학개(John E. Haggai)는 염려야말로 인류의 적 제 1호라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정신분석가들에 따르면 염려는 홍역이나 디프테리아보다도 더 전염성이 강해서 사회 전체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이 가공할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계 모든 나라의 수많은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Hurried, Worried, Buried."(서두르고 걱정하며 살다가 이 곳에 묻히다)
누군가 현대인의 특징을 Hurry, Worry, Angry로 요약한 적이 있는데,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옥스포드 영어사전 최신판에 eyorish라는 단어가 새로 수록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형용사입니다. 만화영화 ‘아기 곰 푸우’에서 푸우의 친구로 나오는 당나귀 ‘이요르’의 이름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당나귀 이요르는 비관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로서 무슨 일에나 항상 걱정부터 하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우리 속담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는데, 날 때부터 걱정하는 팔자를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옛날에 중국 기(杞)나라에 ‘걱정도 팔자’인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붙일 곳이 없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아예 침식을 전폐합니다. 걱정이 태산 같으니 잠도 안 오고 식욕도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고사에서 ‘안 해도 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을 일컬어 기인지우(杞人之憂), 줄여서 기우(杞憂)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 걱정할만한 것을 걱정하는 것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90% 이상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걱정, 또는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쓸데없는 걱정, 다시 말해서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전혀 걱정 안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입니다. 불안과 염려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미리 대비시키는 예방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에 대한 염려 때문에 조심운전을 함으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에 종합검진을 받음으로써 치명적인 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걱정에는 생산적인 걱정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가 당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목록을 열거한 후에 이러한 것들보다 더 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8)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오래 머물 수가 없는 형편으로 인해 자기가 떠난 후 혹시라도 거짓교사들이 몰래 교회에 잠입해서 거짓 교훈을 가르쳐 성도들을 미혹할까봐 늘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였습니다. 이른바 ‘거룩한 염려’였던 것입니다. 꼭 필요한 염려는 해야 합니다. 문제는 지나친 염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삶의 에너지를 낭비해버리는 미련한 마음의 습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고 가정생활을 영위하면서 수많은 걱정거리와 씨름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이런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여기에서 ‘맡기라’는 말이 영어로 아주 실감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cast 즉 던져버리라는 것입니다. 걱정이라는 공을 하나님께 넘기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핸들(handle)해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다면 염려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믿음의 동의어는 ‘맡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거운 짐을 나 혼자서 다 짊어지고 끙끙댑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마태복음 11:27-2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신앙훈련은 맡기는 훈련입니다. 믿음의 척도는 우리가 얼마만큼 주님께 맡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이 맡기는 자는 믿음이 좋은 자요 적게 맡기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맡길 수 있으려면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은행 중에 신탁은행이 있습니다. 신탁(信託)은 ‘믿고 맡기라’는 뜻입니다.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Cast your cares on the LORD.).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짐을 맡겨버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대 한국교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차를 몰고 가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도 딱해서 차를 세우고 아주머니를 차에 태워드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그 아주머니가 머리에 보따리를 그대로 인 채 흔들리는 차 안에서 몸의 균형을 잡느라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왜 그 무거운 보따리는 내려놓으시지 그러냐고 했더니 “이 한 몸 자동차 태워주신 것만도 고마운데 무슨 염치로 이 짐까지 태워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넌센스 같은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지만, 나의 신앙이 어쩌면 이런 신앙이 아닌지 한번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내 인생의 짐을 꼬옥 끌어안고 스스로 부대끼는 그러한 자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힘겹게 끌탕하는 미련한 자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지 한번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염려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매우 실감나게 교훈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돌보실진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저는 이 말씀에서 ‘하물며’(much more)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런 미물들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요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을 돌보지 않으시겠느냐!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인 가운데 만세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돌보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32-34)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는 말씀도 하셨는데, 이 구절은 “염려함으로 너희 생명을 촌각인들 연장할 수 있느냐.”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염려함으로 생명을 연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생명이 단축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염려의 원인이 무엇이든 해결책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염려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merimnao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merizo(나누다)와 nous(마음)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걱정이란 ‘나누어진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질 때 걱정이 고개를 쳐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라질 때 염려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을 향한 단일한 마음(single-minded)을 가져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는 식(double-minded)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늘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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